“얌전히 집에서 일이나 하면서 돕다가 결혼이나 하렴.” 평민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정에 충실할 것뿐이었지만, 그러고 싶지 않았다. 피붙이도 아닌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길러 준 가족들에게 보은을 하기 위해서라도. 다행히 명석한 두뇌와 재능이 있었기에 소수의 평민에게만 허락된다는 아카데미로 향했다.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낸다면 뛰어난 인재로 인정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. 하지만 출생으로 정해진 계급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. 시간이 지날 수록 높아져만 가는 담장을 고개가 꺾어져라 바라보며 기회를 노리고 또 노렸다. 그렇게 졸업까지 버텨 낸 첫 평민이 되었는데……. 그림과도 같은 남자가 찾아와 내가 계획한 미래는 없을 거라 단언한다. “그대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을 겁니다.” “그럴 리 없어요. 전 자격 조건을 다 채웠습니다.” “……지원 자격 조건 말입니까?” 밤하늘을 담아낸 듯한 새카만 머리칼. 설산보다도 새하얀 피부와 반짝이는 별이 비친 호수 같은 푸른 눈. 신이 가장 공들여 조각한 예술품 같은 남자는 느릿하게 웃으며 내 꿈이 이미 조각나 있음을 자각시켰다. 고개를 한껏 처들고 살피던 담장을 넘을 수 있는 날은 없을 거라고. “제게 왜 찾아오셨나요?” “혼인을 제안합니다.”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결혼이라는 단어가 또다시 내게 찾아왔다. 그 거지같은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시간을 견뎠는데. 그러나 분함에도 불구하고 벗어날 곳은 어디도 없었다. 이런 내 막막함을 눈치라도 챈 양, 그는 그림같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. “물론 조건부 계약 결혼입니다.” ***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. 헤어짐이 정해진 시작이라 그런 걸까. 어느 순간 자신의 모든 걸 숨기는 남자가 궁금해졌다. “공작님 괜찮으신가요?” “……제가 알아서 합니다. 거리 지켜 주세요.”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, 아카데미 내내 날 괴롭히던 이황자는 호시탐탐 나를 관찰하며 비웃었다. 천것 주제에 나대지 말라며. 여전히 나를 가로막은 벽은 높고도 또 단단했지만, 그럼에도 나는 괜찮았다. 내게는 눈부신 재능이 있었으니까.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생각한 대로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. 쓸모가 없어진 나를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생각에 무작정 도망쳤다. 새하얀 눈과 새카만 눈만 가득하다는 북부의 설산으로. 내가 버린 모든 것들이 날 쫓을 줄은 모르고. rhodanthe11@naver.com
“얌전히 집에서 일이나 하면서 돕다가 결혼이나 하렴.” 평민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정에 충실할 것뿐이었지만, 그러고 싶지 않았다. 피붙이도 아닌 나를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길러 준 가족들에게 보은을 하기 위해서라도. 다행히 명석한 두뇌와 재능이 있었기에 소수의 평민에게만 허락된다는 아카데미로 향했다.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낸다면 뛰어난 인재로 인정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. 하지만 출생으로 정해진 계급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. 시간이 지날 수록 높아져만 가는 담장을 고개가 꺾어져라 바라보며 기회를 노리고 또 노렸다. 그렇게 졸업까지 버텨 낸 첫 평민이 되었는데……. 그림과도 같은 남자가 찾아와 내가 계획한 미래는 없을 거라 단언한다. “그대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을 겁니다.” “그럴 리 없어요. 전 자격 조건을 다 채웠습니다.” “……지원 자격 조건 말입니까?” 밤하늘을 담아낸 듯한 새카만 머리칼. 설산보다도 새하얀 피부와 반짝이는 별이 비친 호수 같은 푸른 눈. 신이 가장 공들여 조각한 예술품 같은 남자는 느릿하게 웃으며 내 꿈이 이미 조각나 있음을 자각시켰다. 고개를 한껏 처들고 살피던 담장을 넘을 수 있는 날은 없을 거라고. “제게 왜 찾아오셨나요?” “혼인을 제안합니다.”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결혼이라는 단어가 또다시 내게 찾아왔다. 그 거지같은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시간을 견뎠는데. 그러나 분함에도 불구하고 벗어날 곳은 어디도 없었다. 이런 내 막막함을 눈치라도 챈 양, 그는 그림같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. “물론 조건부 계약 결혼입니다.” ***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. 헤어짐이 정해진 시작이라 그런 걸까. 어느 순간 자신의 모든 걸 숨기는 남자가 궁금해졌다. “공작님 괜찮으신가요?” “……제가 알아서 합니다. 거리 지켜 주세요.”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, 아카데미 내내 날 괴롭히던 이황자는 호시탐탐 나를 관찰하며 비웃었다. 천것 주제에 나대지 말라며. 여전히 나를 가로막은 벽은 높고도 또 단단했지만, 그럼에도 나는 괜찮았다. 내게는 눈부신 재능이 있었으니까.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생각한 대로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. 쓸모가 없어진 나를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생각에 무작정 도망쳤다. 새하얀 눈과 새카만 눈만 가득하다는 북부의 설산으로. 내가 버린 모든 것들이 날 쫓을 줄은 모르고. rhodanthe11@naver.com